노재억의 ⟪깎아내기 부딪히기 긁히기⟫(2022)는 그가 그동안 해온 작업과의 연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시사하고 있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해온 재개발 지역 아카이브 작업은 약 4년 간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의왕시 재개발 과정에서 직면한 철거와 일시적인 폐허 상태에 관한 기록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손라주택재개발: 내손동 아카이브⟫(2018), ⟪내손동생활사전: 디지털 아카이브⟫(2019), ⟪내손아카이브: 내손동 이주 사전⟫(2020),⟪내손 기억 기록展⟫(2021) 등을 통해, 노재억은 3인으로 구성된 ‘내손아카이브’ 콜렉티브를 꾸려 철거를 앞두고 폐허가 된 재개발 지역의 장소성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이때 그는 인류학적인 태도로 실제의 장소 안에 내재해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그대로 기록하기 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며 비정형의 물성에 주목했던 정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일련의 내손동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폐허가 된 장소들을 방문하여 버려진 종이 상자나 찢겨나간 벽지, 문짝, 액자 등과 같이 원형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잔해들과 소멸을 앞둔 폐기물을 가져와 추상적인 조형적 시도로 일관해 왔다. 대개는 그러한 조형적 시도가 단순한 기록물의 배열처럼 보이기 보다는 수집한 물질을 재맥락화 하는 최소한의 개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은 노재억의 재개발 지역에서의 아카이브 작업이 단순한 기록에 목표를 둔 작업이 아니라, 수집한 삶의 잔해들을 조형적 형태로 재구축하여 그 형태 안에 잠재되어 있는 미학적 성찰을 새롭게 도모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말하자면, 삶의 형태에 관한 다큐멘터리적 시선과 달리 형태의 삶을 사유하는 한 사람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 ⟪깎아내기 부딪히기 긁히기⟫는 구체적인 동사적 행위를 내세울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명백한 미학적 태도와 긴밀하게 교차하여 임의의 정제된 조형적 형태에 대해 사유하게끔 한다. 그동안은 폐허의 현장에서 수집한 잔해들을 그 형태에 남겨진 미비한 흔적을 기반으로 쌓고 붙이고 배열하는 조형적 행위에 집중해 왔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그 미학적 행위가 회화적 조건들과 공명하는 순간에 천착하려는 최근 작업은 하나의 전환점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나는 나의 아키비스트가 되고, 그것을 드로잉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덧붙여서 “제작 과정을 중요시 한다”며, “주관적 의식들이 창작물로 표현되기 위해 자신이 사는 환경, 인간의 생산활동에서 비롯되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것의 근원을 캐내려 한다”고 했다. 노재억은 폐허에서 수집한 재료의 물성 연구를 통해, 그것의 “근원”이 회화적 매체와 맞닿는 지점을 탐구하며 그 과정 속에서 회화의 매체 조건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문, 창문, 벽지, 장판 등 삶의 잔해들 속에서 건져 올린 재료를 하나의 회화적 지지체로 재정의하여, 그는 시멘트 덩어리, 돌, 지푸라기, 흙과 같은 자연과 인공물의 파편들을 재료 삼아 그가 “오브제 드로잉”으로 명명한 창작의 과정들을 제시했다. 그는 삶의 형태들 속에서 임의의 물질이 형태의 삶으로 전환되는 찰나에 개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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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벽에 걸려있는 여덟 점의 회화는 10호가 채 안되는 정방형 크기(30x30cm)가 대부분이고 그것보다 조금 더 크거나, 조금 더 긴 회화가 중간중간 시선의 변화를 유도했다. 재료는 모두 “혼합재료”로 표기되어 있는데, 사실 회화의 표면을 하나씩 차근차근 살피더라도 그 혼합매체의 구체적인 면면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의 제목은 어린 아이>(2022)부터 (2022), 바다 주름>(2022), 흰 틈>(2022), (2022)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그림들 치고, 사실 재료나 제목에 있어서 우리의 현존하는 시지각적 경험이 마주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실체가 느껴져 모호함의 더욱 가중된다. 

   노재억이 “회화”라 부르는 이 그림들은 공통적으로 특유의 물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 같기도 하고 진흙을 이겨 붙여놓은 것 같기도 하며 간혹 그 재료들이 마르면서 표면에 어떤 균열과 두께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물질의 비정형적 감각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캔버스를 지지체 삼은 근거로 인하여 회화적 표면으로 환원되기도 하지만, 그 물성 특유의 감각이 동시에 그것을 조각적 덩어리로 인식하도록 한다. 이는 벽에 걸린 이 평면의 그림들이 회화적 결론에 도달한 작업으로서 명분을 획득하기 보다, 회화적 절차들을 통해 회화적 감각에 도달할 일련의 조형적 단서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회화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목표로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의 받침대 위에 설치되어 있는 깎아내기 부딪히기 긁히기>(2022)는 전시제목과 동명의 작업으로, 임의의 여러 물질들로 채워진 투명한 원기둥 형태의 수조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노재억은 재개발 지역의 폐허를 다니며 수집해 온 재료들을 미학적 실천과 연계해 일종의 “아카이브로서의 회화”를 제작할 만한 조형적 단서를 찾아온 셈이다. 흙, 돌, 종이, 지푸라기, 낙엽 등 그는 폐허에서 가져온 물질을 객관적인 지표로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형적 변환에 더욱 집중해 이미 본래의 형태와 기능에서 탈락된 임의의 물질이 새롭게 (미학적) 형태로 재구축되는 상황을 기록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는 형태와 기능을 다한 물질을 동일한 유닛의 틀에 담아 비정형의 추상적 형태로서 받침대 위에 일으켜 세워지는 삼차원의 인스톨레이션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다분히 조형적 논리에 근거한 이 과정과 절차는, 역사의 잔해이자 현실의 파편들을 가지고 추상적 사유의 구축물로 변환시키는 창작자의 동시대적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노재억은 회화의 결론에 도달하기 보다는 과정 상의 회화적 절차를 사유함에 따라 자신의 작업이 회화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깎아내기”, “부딪히기”, “긁히기”와 같이 그가 폐허에 방치된 물질에 대해 신체적으로 반응했던 행위를 수행적으로 가져와, 그는 그 행위가 회화의 표면을 매만지는 창작자의 제스처와 교차시켜 놓았다. 일상적인 동사가 회화적 제스처로 변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잔해가 회화적 매체로 변환되는 알리바이가 성립된 것이다. 와 같이 조각적 조건에 충족한 행위일 수도 있고, 그 과정을 거쳐 회화적 표면을 완결 짓는 행위로 명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노재억은 회화로 명백히 환원되는 매체가 아니라 회화적 조건을 충족시킬 매체로서 삶의 형태로부터 파생된 잔해들을 모아서 분류하고 결합하여 다시 공간 속에 일으켜 세울 임의의 형태를 찾아가는 셈이다. 

   한편, 그의 작업 제목이 다소 생소하고 모호하게 들리는 것은, 이 명사의 나열이 언어적 관습을 따르지 않고 임의의 추상적 사유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재억은 작업을 하는 가운데 상당한 양의 글을 써 왔는데, 특히 이번 회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수집한 물질들처럼 임의의 단어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물성 연구에 기반한 회화 작업을 수행하면서, 그는 그 물성과 행위에 대한 감각이 임의로 엮인 사태처럼, 임의의 단어들을 조합해 보다가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으로 두 개의 단어로 조성된 제목을 짓게 됐다. 그것은 여러 경우의 수에서 산출된 임의의 결과물이자, 그 순간 유일무이하게 획득한 추상적인 기호로도 작용한다. 


   노재억은 이 전시에 대해 말하면서 “정제”라는 단어를 자주 꺼냈다. 서로 다른 시공간, 이질적인 파편들, 기능과 형태가 없으나 물질과 사물의 경계에서 애매하게 놓여있는 현상들, 이 모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개입을 통해 일련의 “정제”된 근원적 형태와 그것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전시의 경험이라 단지 보이는 것들을 지각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여러 시공간에서 경험해 온 비선형의 과정들을 추론하고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점검하는 일이기도 하다.